구기자의 세상만사

HOME > YouTube > 구기자의 세상만사
구기자의 세상만사

한양도성의 슬픈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0-11-16 08:56 댓글0건

본문

[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서울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 도성길은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1396년 건국 초 축성한 것이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4930_584.jpg
 

성곽은 석성과 토성으로 6대문과 4소문을 두고 동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서북의 창의문 서넘의 소덕문 동대문에만 성문 보호를 위해 이중으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은 비밀통로로 문루를 세우지 않은 암문으로 원래 숙청문을 숙정문이라 불렀다.


세종 4년(1422년) 대대적인 보강공사로 흙으로 된 부분을 돌로 다시 쌓고 공격과 방어시설을 늘렸으며 임진왜란 후 숙종 30년(1704년)은 정사각형의 돌을 수직으로 쌓아 방어기능을 강화하여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4956_8268.jpg
 

광희문은 4소문 중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1396년 축성된 남소문으로 속칭수구문이라 불리웠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붙었다. 


서울시는 지난 12일 남산 회현동 자락의 한양도성 유적을 공개했다. 1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사라진 줄 알았던 도성의 일부를 드러낸 것이다. 남산지구와 장흥지구 구간의 성벽은 1970년대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는데 남산 3호터널 공사장에서 나온 석재를 사용했다. 


자유총연맹터와 반얀트리(옛 타워호텔) 자리로 연결되는 구간이지만 이 곳에 도성의 흔적은 없다. 햔양도성의 일부그간을 헐고 여기서 나온 성돌을 자유연맹과 타워호텔 건축 두 건물의 건축에 쓰였다는 사실이 2007년 문화재청 조사에서 밝혀졌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4982_3239.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4993_8135.jpg
 

당시 건축 설계를 맡았던 김수근1931~1986 결과적으로 우리의 주요 사적을 훼손해 호텔과 공공기관도 아닌 자유총연맹을 짓고 그 틈에 호텔신라가 끼어 들어 천혜의 문화유산을 깔아 뭉개 왔다는 사실을 누구도 항거하지 않았다.


일본의 반도침략의 역사를 거슬러 임진왜란 때 적군 도쿠가와 장수들이 조선의 궁궐을 접수할 때 통과했던 남대문은 대대로 동방예의지국으로 외국으로부터 들어 오는 사신들에 예를 갖춘다는 의미로 숭례문이라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시대 중앙청에 자리잡고 있던 총독부가 세종대로길 정 중앙을 가로막고 있던 남대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일본 왜군의 한양입성 때 통과했던 문이라 그들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018_0163.jpg
 

그런 남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어느 취객의 화풀이로 불에 타 전소되는 모습을 온 국민 뿐만 아니라 외신을 타고 전 세계가 다 보아 알고 있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056_6804.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6027_9057.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6056_2128.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6222_5875.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6237_0321.jpg
 

 

중앙청이 일제의 잔재라며 뚜껑을 따고 건축물을 해체하는 순간 그 안에 모셔져 잠자고 있던 수많은 유물들은 용산공원 내 대체부지에 박물관이 지어지는 동안 썩어 유실되기 시작했다. 수 천억원의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동안의 부실과 시행착오, 국민의 불편과 고통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792_5467.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812_0608.jpg
 

그렇게 역사적 가치를 지닌 멀쩡한 건축물을 일제의 잔재로 보고 해체하거나 폭파한다면 서울역 역사도 일제 때 일본의 기술로 지어진 것인데 왜 그냥 두는건지. 지금은 도서관이 된 옛 서울시청사도 일제의 잔재 아닌가?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753_2619.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835_1387.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079_9018.jpg
 

불에 탄 남대문은 복원되었으나 예전의 고풍스러운 그 기상과 위용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인테리어 시멘트 공사였다. 소실된 국보에 대한 처벌은 없었고 나라의 국록을 받는 고위직은 달라진게 없다.


남대문은 복원과정에서 목재가 빼돌려져 대목장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내리고 한심한 사연들은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사가들은 광화문의 현판 글씨체를 두고 몇 년을 옥신가신하는 꼴을 보였다.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양 도성 외 '순라길의 복원'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을 줄건지 한양의 도성과 역사는 말이 없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096_667.jpg
 

한편 한양도성길 18.6km의 복원 중 서울의 1,000년 역사는 물론 송파 하남 선사유적의 발견 등으로 서울의 2000년 유래는 역사적으로 이미 고증이 끝났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904_4048.jpe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172_2772.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875_7221.jpg
 

한양의 도성길 중 동대문은 중요한 사적과 문화재로 혜화동 방향에서 남산 쪽으로 연결되는 주요 구간의 중심이다.  4대문 가운데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상업지구 중심 청계천을 가로질러 6.25 한국전쟁 때에도 견뎌낸 대한민국 역사의 상징이 보물지정 조차 되어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문화재청과 정부, 그리고 우리의 사학자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심하기 그지 없는 나라다.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203_2665.jpg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943_157.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976_8988.jpg

63ad2dd82959fab87b198ff134ffa86a_1605485215_8168.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