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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중심 종로 - 그리고 영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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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4-02-03 10:1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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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낙원동 인사동길 허리우드 낙원상가 주변 그 일대는 지금도 옛 모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지난 대선 당시 줄리의 남자라는 벽하가 그려졌던 옛 화신백화점 종로타워 뒤 우미관은 야인시대의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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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로 유명했던 단성사는 개화기 이래 첫 한국영화를 상영했던 곳으로 한국의 영화가 만들어 지고 탄생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 한국영화의 거점이기도 했던 곳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한국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지금의 종로3가 묘동 단성사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연극무대에 올려 당시 경성의 상징이던 서울역 남대문 명동거리 한강 전차 철도 등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을 올린 것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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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탄생 100주년을 알리는 '제57회 영화의날' 행사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인총연합회가 주최하고 당시 문화관광체육부 영회진흥위원회 영회진흥공사 등이 후원해 '영화의날'이 성황이 되어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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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세계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활동사진 영상이 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상품으로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해 이듬해인 1896년 중국의 상해, 1897년 일본의 고베에 전해짐으로써 시네마그라피 시대를 열었다. 


당시의 활동사진 영상은 뺴어난 서구 유럽의 도시풍경과 경치를 담은 파노라마 형태로 극적인 연출이난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없었음에도 그 신기함에 참으로 묘한 매력으로 탄성이 터져나와 상업적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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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초입은 일본의 청나라 침공, 그리고 욱일승천하던 일본의 러시아와의 전쟁 등으로 일본 일본인 기업 단체들의 조직적 한반도 이주가 많아지면서 명동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의 상권과 주거지를 중심으로 신식 문화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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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부근에 일본의 가부키 공연을 위한 가부키座 전용극장이 들어섰고 충무로 명동 을지로 일대는 일본인들이 즐겨 찿던 거리와 극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 1912년 대정관, 1913년 황금관, 1915년 유락관, 해방직전까지 일본인 중심의 영화관이 운영되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 용산에는 사쿠라座, 용산座 등이 설립되어 문화와 대중들의 영화와 영화이야기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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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했던 북촌 일대의 영화중심은 단연 종로였다. 1907년 설립되어 1918년 활동사진 영화연극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던 한국영화의 성지는 단성사였다.  


1912년은 당시 화신백화점 뒷골목의 우미관이 개장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극장이 유명했다. 피맛골이 야인시대의 배경이 되는 동안 우미관과 조선극장은 한국영화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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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관이 들어선 이래 일본인관객들 유치를 위한 '다이쇼칸1912~1935, 고가네칸1913 등이 해방 이후까지 운영되면서 상영관으로 국도극장이 을지로에 세워지기고 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극명하게 구분되던 일제 강점기에도 영화전용관인 '경성연예고등관' 1910년 설립 등 조선 사람들과 일본인들은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 영화와 연극을 설명하며 활동사진 영상을 감상하고 웃기도 울지도 했다. 文化-문화란 이런 것일까?


1912년 종로에 들어선 우미관은 당시 영화관으로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1916년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독점계약을 맺고 '몬테크리스트 백작' '카투사' '파우스트' '명금'등을 상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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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상징적 실존인물 김두한은 우미관을 배경으로 일본인들과 밀고 밀리는 밀당으로 유명하다. 인근의 관철동은 그 당시에도 선술빕이나 음식점 기생집들이 즐비해 늘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1922년 10월 인사동 초입에 설립된 '조선극장'은 상설영화관으로 조선극장의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춘향전'을 최초의 활동사진 영산으로 영화를 만들어 상영했던 곳이다. 


단성사의 사주는 박승필로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태생이었다. 주식회사 내 촬영부를 두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인 최초의 제작 편집 촬영 상영에 성공한 것이다. 특히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었던 좋은 무대로 토월회의 정기공연, 극예술연구회 등의 공연 장소로 조선의 문화 예술 그리고 현대식 엔터태인먼트 문화중심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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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광무대의 오너 경영자 박승필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연회 등을 공연하는 등의 흥행 승부사적인 경영감각을 발휘하였고 암울했던 당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과 일본의 자본과 권력의 우여곡절 사이에 종로를 지켰던 인물이다. 


박승필의 출자로 만들어진 단성사에서 최초의 활동사진극영화 '의리적 구토'는 1919년 10월 27일 조선인에 의해 제작된 한국 최초의 '한국영화1호'로 정해지고 지금까지 '영화인의 날'이 매년 10월 27일인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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