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세상만사

HOME > YouTube > 구기자의 세상만사
구기자의 세상만사

행주대첩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2-01 10:39 댓글0건

본문

[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1592년 4월 일본왜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부산을 침략해 파죽지세로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는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해 의주로 달아났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718_1799.jpg
 

이듬해 조선은 명나라와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서울 북서쪽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패함으로 전세는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592년 7월 충청도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라도 일대를 지켜 낸 권율의 군사는 수도권에서 한양탈환을 도모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775_5802.jpg
 

벽제관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무려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1593년 2월12일 행주산성을 총공격했다. 총사령 우키다, 이시다 미쓰나라, 고니시 유키나가. 백전노장의 다카카게 까지 전투력 최고조의 장수들이 행주산성에 들이닥폈다.  


일본군은 3진으로 나누어 총 9차례에 걸쳐 행주산성을 공격했지만 10분의 1도 안되는 군사력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83_3712.jpg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91_8881.jpg
 


우선 험준한 행주산성을 요새로 진을 치고 전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선점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의 로켓포와 같은 신기전 외 화력이 월등했던 조선군의 신무기가 있었다. 


한강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조선군의 보급과 병참 등의 지원이 있었고 전투에서의 승리로 사기와 신념에 가득찼던 조선군의 결기와 권율 장군의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56_7457.png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61_1246.jpg
 


행주산성은 백제 때 처음 축조된 것으로 석성과 토성의 이중구조로 모책으로 만든 울타리가 두 겹으로 된 요새였던 것이다. 산성의 좁은입구로 진입을 시도했던 일본 1군,2군은 일종의 대량살상 포탄 조선의 '비격진천뢰'와 화약무기 발사체인 '화차'의 맛을 톡톡히 보아야 했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31_7951.jpg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40_6303.jpg
 

일본군 3군은 누갇을 짓고 높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려 시도했으나 조선군의 천자총통에 맞라 누각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총사령 우키타의 4군은 행주산성의 목책은 뚫었으나 조선군의 결사항전으로 부상을 입고 퇴각했다. 


일본군 5군이 城에 불을 지르려 하자 이를 알아채린 권율 장군의 군대는 미리 준비했던 물을 끼얹어 화공을 저지했다. 서쪽으로 일본군 6군이 침투하려 했을 때는 조선의 승병들이 지켰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21_8554.jpg
 


이어 7군이 성의 서똑을 뚫고 들러와 조선군이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배 두척에 수만개의 화살을 싣고 나타난 배를 보고 이순신의 배가  아닌가? '하고 놀라 물러날 기세을 보였던 일본군을 '추격하라'는 권율은 명령을 내렸다. 장군은 3진의 일본군 3만명을 퇴각시킨 것이다.


행주산성에서의 대승으로 일본군사는 한양에서 철수해 남으로 퇴각했고 임진왜란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행주대첩은 한산대첩 명랑해전과 함께 조선군이 외세를 꺽고 크게 승리한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535337c1af07a9e7214eec981a7f3df4_1701394611_8166.pn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