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결정적 순간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1-28 12:30 댓글0건첨부파일
- 085mLREiCtWyQgoGRshAmmsUdC-AV555kBdZQSxR10IC1-WDY-UpF86S3o5Se2UydQXaIM5_-twC2otohurYlQ.webp (52.2K) 0회 다운로드 DATE : 2023-11-28 12:30:53
- imgres.htm (782.4K) 0회 다운로드 DATE : 2023-11-28 12:30:53
관련링크
본문
[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이승만(1875~1965)은 우리나라의 개항 이전 1875년에 태어나 1890년대 말19세기말엽 부터 만민공동회를 주도해 왕정을 허물고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이끈 인물이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제헌의회의 기틀을 놓고 헌법에 기초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이승만 - 불굴의 의지와 꺽이지 않는 신념 등 그의 결정적 순간과 행보는 역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조선의 왕실에 의회설립을 요구하고 '고종의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6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던 조국 한반도의 앞날을 걱정했던 이승만은 駐조선 공사를 지낸 딘스모어 휴 공사에게 조선을 도와달라는 밀서를 전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을 무렵에는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공산군 세력과 협상해 휴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해 미군과 연합군의 진격을 강하게 요청했다.
결국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는 대신 언제든 미군이 철수하면 다시 쳐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다. 오늘날 70주년을 맞이하는 한미동맹은 실제로 미래를 내다보았던 이승만 삶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을 이끌어 낸 일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1898년 3월 10일 조선의 만민공동회는 만명이 모이는 집회로 정치적 개혁을 조직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당시 선각자였던 서제필이 세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민영환과 박정양을 필두로 하는 개혁정권의 출범을 보았다.
당시 실권이 없었던 중추원을 의회로 만들어 왕에게 의회정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헌의 6조'를 내세워 개혁과 혁신. 신분의 평등 등을 주장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는 조선왕실의 복귀가 아니라 조산의 '민주공화정'을 향한 초석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