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양용 1762~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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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11-22 18:41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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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은 문신으로 유학자요 실학자였다. 1789년에는 배다리를 축조 설계하는데 참여한 기술자요 문무융합 기술의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것을 추진했으며 상여가 한강을 안정적으로 건너기 위해서는 주교 - 즉 배다리를 가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주교는 30자 너비의 갑선 0척을 나란히 붙인 후 그 위에 종량을 깔고 횡판을 대는 형식으로 가설해 나아갔다.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것은 새 정치를 위한 의도로 수원 팔달산 아래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1792년 정조는 다산에게 '화성'을 축조하라는 명을 내렸고 다산은 화상 축조에 필요한 사항을 정리해 올렸다.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와 녹로 등을 활용해 무거운 건축자재들을 옮겼다.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다산은 거중기 제작에 드는 철과 구리의 사용을 최대한 줄여 기본원리에 집중했고 녹로는 화성의 성벽을 쌓을 때 사용했다.
돌을 나르고 적재하는 과정에서 유형거는 지렛대와 도르레의 원리를 응용했다.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낙향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무려 18년을 유배생활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의 역작을 남겼고 신기술을 도입하고 기술자 양성을 위한 국가기술연구소 설치 등을 제안했다. 경세유표에서 '이용감'은 차관급 직제로 이용후생을 지원하는 관청의 역할을 했다.
아울러 이용감은 과학, 외국어 손재주 안목 등을 자격요건으로 기술인재를 선발해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감에서 시험해 각 관청에 전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정약용은 사람다움과 나라다움에 대하여 실질적인 모범이 되고자 했던 인물이다. '사람은 사람 다워야 하고 나라는 나라 다워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모두가 세겨 보아야 할 만한 교훈이다.
기와와 벽돌을 담당하는 견와서, 수레의 제작을 위한 전궤서, 화폐와 병궤를 담당하는 전환서, 선박제작을 담당하는 전함사, 방직기술의 향상을 위한 직염국, 제지기술에 앞장섰던 조지서 등 지금도 생소한 이름의 부서들에서 문과 이과 구별없이 융합과 경계를 넘나들었던 과학기술의 대가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수원 화성 신도시 건설에 앞장서 독창성과 과학의 원리를 적용해 나라의 부강 경제를 일으키려 애썼던 다산 정약용의 철학과 기술융합의 선구적 실학사상은 메가시티의 전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 특성화 사업에 깊이 참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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