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朴家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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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07-01 09:5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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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光化文 광화문은 여러가지 면에서 청와대 경복궁 세종로와 함께 우리나라 근대 개화 현세를 통털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조선왕조의 상징이자 백성을 기쁘게 하라는 의미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임금 왕의 큰 덕이 온나라를 비춘다'는 뜻도 있다.
전통 봉건사회에서 유교적 가치와 백성과 더불어 태평성세를 누리고자 했던 조선의 이념적 지향의 대표적 표지 현판글이다. 국민의 광장이 된 광화문 일대는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시민의 목소리와 함께 정치적인 목적의 집회와 활동의 場마당이 된 세종대로는 종로와 종각 조계사 덕수궁 창경궁 청계천 중구 그리고 남산 남대문 소공동 명동 서울역 등 우리나라 대표적 도심 속 옛 모습을 간직한 온통 사적지들이다.
색조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계절에도 국가에도 기조색이 있듯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 잡는 화장품에는 매년 그 해를 상징하거나 유행을 선도하는 기조색이 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유교적 양반사회에서 '금지된 욕망'에 해당하던 미니스커트와 댄스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감추고 덮었어야 할 허물이었던 그때 그 시절에도 '박가분'이라는 동동구리무 보다 더 귀한 보물이 있었으니 전통가치에 대드는 근대적 자아의 발견은 변화를 주도하는 신여성들의 아이콘이었다.
개항 이후에는 서양의 화장품이 양주 위스키 양담배와 함께 유학파 교사 하란사 1875~1919 등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오~ 우물 밖의 세상을 향기로 색깔로 알려준 개화였다.
근대적 신여성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증명이라도 할 기세로 빨간 구찌베니에 얼굴과 피부를 가꾸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조선의 여인에서 양장을 하고 핸드백에 우산을 들고 자유롭게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 이화학당 배재학당 배화여숙 숙명 동덕 덕성 이화 등 여성교육과 일본식 문화에 서양의 화장품을 모방한 백분 크림 비누 등 밀수품들이 성행하여 여성을 매혹하는 문화적 표상이 되기도 했다.
1916년 이에 대응해 우리이름의 최초 브랜 화장품 '박가분'의 탄생도 이 즈음이었다. 국내 토종자본으로 종로 이명래 고약과 함께 박승직 상점은 1896년 종로4가에 최초 설립 창업되었다.
박가분의 제작자는 박승직의 처 정정숙 여사였다. 종로구 입정동 어느 노파가 백분을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을 눈여겨 본 정정숙 여사는 부군이던 박승직이 운영하던 포목점의 사은품으로 나눠 주기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1922년 11월 24일 자 동아일보 2면 박가분 광고에는 '박가분을 바르면 주근깨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 매우 고와집니다'라는 광고가 실린 기록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과대 과장광고로 단속이 될 수도 있으나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보다 더 좋은 화장품이 또 어디에 있었겠는가!
뱃길이라 서울에서 사흘 목계나루에 이흐레 나흘 찿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충주 출신의 신경림 작가의 '목계장터'라는 詩다. 전국 각지의 방물장수를 통해 재래식 화장분을 브랜드 '박가분'으로 팔려 나간 것이다. 민심과 함께 여심을 통해 전국의 경제를 살리는 '박가분'이었다.
1930년대 동동 구리무 열풍 전후의 서가분 장가분 서울분 설화분 등의 유사품이 대거 화장품의 제조와 유통에 뛰어드는 계기로 기미를 감쪽같이 가려주거나 지워주고 잡티를 제거해 화사한 얼굴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우리나라 조선의 개화기를 그렇게 근현대사를 맞이했다. 조선여인 후예들의 저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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