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관 譯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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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06-08 07:5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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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우리나라에서 통역업무를 전담하던 관청은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 통문관이었다. 국가가 양성했던 조선시대의 역관은 중인의 신분으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간 사신단에서 통역을 주로 담당했고 국내를 방문하는 외국사신들을 수행하고 통역 등 주요한 일들을 맡아왔다. 조선시대의 4대 외국어는 주로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였다.
대체로 10세를 전후해 사역원의 생도로 들어가 20세가 넘으면 역과 시험을 통해 역관이 되었다. 유교경전이나 한시 등 조선의 문관이나 중국의 관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내용을 이해해야 했던 것으로 경국대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역관들이 있었을 정도다.
일본어 교재로 '첩해신어'라는 책은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책'이라는 의미로 '속성으로 배우는 일본어'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역관 김지남은 청나라에서 유출을 금지했던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방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이라는 책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지남 역관은 1712년 청나라의 장수 목극등을 따라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데 공헌했다고 전해진다. 西쪽으로는 두만강, 東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정해 백두산 천지를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것도 역관이었다.
'통문관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홍순언 1530~1598이란 역관은 명나라로 그의 임무를 수행하러 가던 중 어느 한 여인을 구해 주었는데 이 여인이 후일 명나라 군사권을 장악한 병부상서 石星의 후처가 되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내는데 크게 도움을 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636년 제4차 조선통신사 일행의 행렬도에도 정식사신 뒤를 따르는 역관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경진년 연행도첩 문무도에는 중국을 다녀 온 사신들이 영조가 열람하기 쉽도록 21폭의 화첩의 제작 등에도 역관의 숨은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오늘날 외교사에 기억할만한 일들의 통역과 안내 기록 등 '조선의 역관'은 한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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