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자의 세상만사

HOME > YouTube > 구기자의 세상만사
구기자의 세상만사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3-04-15 06:59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즈음 로마의 전통가문 출신의 정치인이자 성직자, 군인, 저술가, 철학자 사상가였다. 줄리우스Julius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July 7월은 '정치'라는 숭고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457_5039.jpg
 


그의 비참한 죽음에도 사후에 그의 이름은 양자이자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신격화되어 후대에 전해진다. 군주의 의미로 차르와 카이저가 로마 최초의 황제 이래 그의 이름을 따서 정통성과 황제의 권위를 이어 왔다.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478_1833.jpg
 


당시 로마는 군대 출신들이 정치를 장악하고 귀족들이 되어 술라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지배했다. 술라의 아들 폼페이우스 조차 민중의 편에 있던 카이사르를 회유하고 압박했지만 카이사르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쌓아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사학을 공부했던 카이사르는 연설의 대가가 되었다. 술라 밑에서 권력을 등에 업고 재력가가 된 크라스스와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신임을 받지 못했고 카이사르는 이들과 함께 권력의 분립과 균형을 조화롭게 잡아 나아가는 삼두정치를 바탕으로 당시 관직 중 최고의 자리인 집정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491_395.jpg
 


자신의 외동딸을 30살이나 많은 폼페이우스에게 준 카이사르는 갈리아정복을 8년간 하며 기원전 54년 루비콘강을 건너 아무런 정항없이 대승을 거둔다.신전과 공공건물을 세우고 부채삭감과 세금제도를 개선하고 이집트의 태양력을 받아들이는 등의 혁신과 개혁정책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종신독재가 진행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로 하고 23곳이나 찌른다. 그런 무리들 중 자신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 블루투스를 발견하고 '불루투스, 너 마저 ..'라는 말을 남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죽음을 상징하는 금화가 발행될 정도로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무리들을 몰아내고 축출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514_0937.jpg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524_3226.jpg
 

당시 로마왕권은 카이사르의 후광을 업고 로마 최초 황제의 칭호를 받아 오늘날 해가 지지 않는 로마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거룩한 로마황제의 계보는 카이사르를 역사 속의 인물로 신격화하여 정통성을 확고하게 한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후에 로마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545_61.jpg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556_0531.jpg
77517e04741e3abf96a5ba43adb72fc9_1681509579_2096.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