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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과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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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2-11-24 11: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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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고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1910년 한일합방을 우리는 경술년 국치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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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약이라는 말은 억지로 강제로 빼앗긴 불평등 부당한 조약을 의미한다. 을사늑약에서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5년의 시간은 고종의 외교를 통한 노력과 그 사이 의병 의인들의 항쟁 때문이었다. 


중국 본토에 해당하던 만주를 놓고 벌인 인본과 러시아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견제도 있었지만 러시아와 일본은 북만주의 이권을 러시아가 지키고 대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는 사실을 묵인해 주는 것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리지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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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한반도의 침탈행위에 기세를 올리던 일본은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 이토 히로부미 원장이 서울에 와서 동양평화를 위한 일본의 뜻은 전하고 같은 달 15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협약안을 고종에게 내밀었다. 


1905년 11월 17일 오전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2만 5000명이 지금의 덕수궁(당시 경운궁)에 집결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무장헌병과 일본경찰들이 궁권안팍을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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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이들에게는 1905년 을사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란 불명예가 따라 붙었다. 


찬성의 의사를 밝히지 않은 고종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조약체결을 막았어야 할 일이었으나 덕수궁 담장 바깥 중명전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 찍힌 '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은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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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고 조약을 근거로 이듬해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됨으로 시종무관 민영환 외 많은 이들이 자결함에도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 일제강점기간의 틀을 만들어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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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하겠다는 의병들의 봉기나 남녀노소 할 것 없었던 구국 계몽 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을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환희를 맞이하며 36년간의 치욕의 역사를 살았던 우리는 5년 뒤 동족상잔의 비극 6.25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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