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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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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충모 작성일22-06-08 10:2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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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구충모 기자] 1962년 12월 12일 강원도 철원 동송읍 오덕리 출신 우상호는 학생운동 출신의 정치인으로 '86세대 맏형'이다. 연세대학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하며 독재에 항거했던 당시 대한민국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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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외 유혹의 기술 등 촌놈 우상호의 감성 에세이가 저서로 남아 있다. 사단법인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로 더불어 민주당 서대문갑 지역위원장으로 지난 7일 제21대 국회의원으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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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1녀 중 막내로 철원 동송초등학교 서울 광운중학교 용문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학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지주집안의 장남으로 동경체대 체육학과 유학한 엘리트였으나 6.25 전란 중 재산을 공산당에 빼았기고 집안은 시련과 몰락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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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 모두 가난 탓에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 하였고 우상호 역시 대학 재학 내내 고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고 선생을 목표로 시인이고자 했던 우상호는 실제로 재학시절 오월문학상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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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우상호는 군 복무 중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 등의 참여로 '84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4년 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다 10,28 건국대학교 항쟁 후 특유의 신망으로 학생회장이 된다.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강조했던 우상호표 비폭력 문화재방식의 운동이 그를 정치권으로 몰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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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정권의 독재가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기존 헌법의 유지를 내세우자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1987ㅕㄴㄴ 6얼 9일 이전 보다 훨씬 많은 다수의 학생이 참여했던 집회에 당황했던 경찰이 쏜 최류탄에 대학후배인 이한열이 맞고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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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이한열의 喪을 찿아 상주 우상호의 손을 잡고 학생들 덕에 풀려났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1987년 8월 22일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가진 이한열 49제 때 영정사진을 들고 연세 백양로에서 경의선 신촌역 철교 앞에서의 사진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염원하던 6월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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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이한열 추모사업회 활동 등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상호를 친아들 처럼 여겼고 2022년 1월 별세했을 때 역시 護喪을 맡았고 사진 속 배우 안내상과 우현과는 지금도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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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는 박종철 물고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데 최환 공안부장 검사에 대한 고마움은 있으나 공안검사 시절 붙잡혀 간 자신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운 감정이 더 많다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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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으로 부터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제안을 받지만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이후 김대중의 새 인물로 서울 출마를 고려할 때 영입된 인사가 이해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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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김영삼이 노무현을 영입할 때도 우산호가 제안을 받아들었다면 이해찬과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인물이 우상호다. 당시 나이 25세로 최연소 국회의원 26세였던 김여삼의 기록을 깨고 등언할 수 있었던 일을 거절했던 것은 양김 단일화의 실패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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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검문검색으로 전두환정권 하에서의 국가모독죄로 구속되고 수감되면서 그후 언론 출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치 입문한다. 대학동문인 이성헌과의 여섯 번의 데드매치에서 첫번째는 2%차로지지만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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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경선에서도 당시 대세이던 이인제 대신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던 인물이다. 86그룹의 대부분이 김근태를 지지할 때도 우상호는 노무현의 비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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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의 국민참여운동본부는 희망돼지 모금운동 등으로 후보간의 흔들기에 노무현 만들기에 성공한다. 정치인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을 여덟번이나 했다. '이언주는 경유형 철새, 영도는 철새 도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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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는 대구에서 뼈를 묻겠다더니 살은 서울로 올라왔나?' '유인촌은 전북 완주 출신'이라는데 정작 유인촌이 '나는 서울에서만 56년 살았다'고 하자 그럼 이본에서 태어나 대통령 한 사람은 일본사람이냐'고 맞받아 유며와 윗트를 동시에 가진 명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상호의 정치쇄신 혁신시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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