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뉴스

HOME > 전국뉴스 > 전국뉴스
서울

전국 |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5] 모진 고문의 연속, 진실은 아직 살아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희 작성일20-10-28 11:49 댓글0건

본문

-1974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 3학년(72학번), 송운학 


[전국기자협회=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기고] 


그 해 3월 중순경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학교에서 아카데미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내 고민을 듣더니 유인물을 주면서 한번 읽어보고 참고하라고 말했다. 그 유인물은 전태일 일기였다. 내가 읽은 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글이었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내 영혼이 깨끗하게 세탁된 것 같았다. 그 전에는 전태일 열사가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환경 및 초저임금에 항의하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 정도로 낮게 평가했던 나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자유민주주의, 이중에서도 특히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를 신봉하면서도 민족통일이라든가 남북평화공존 등 최우선가치를 위해 조금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관념적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기를 읽고 유신독재자에게는 불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을 불나비처럼 보일지라도 부족하지만 내 자신을, 적어도 내 청춘을 민주화운동이라는 제단에 제물로 바쳐 적어도 징역 15년을 감내하기로 결심했다. 또, 후일 보다 발전된 다양한 민주정치를 탐구하게 되었고, 끝내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나에겐 실로 성경이나 불경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결심을 굳히고 나니 기회가 쉽게 주어졌다. 우연이었겠지만, 사회학과 이종구 학우가 시위에 사용할 선언문과 가제(假題)가 3민(민생민주민중) 백서인 문서 등 유인물 초안을 작성하는 비밀 팀을 구성하는데 합류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흔쾌하게 수락했다. 당시 팀원은 나를 포함하여 내가 남산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명을 모른다고 잡아뗀 복학생 선배 1인과 상대학생 2인 및 문리대 70학번 선배 2인 등 총 6인이었다. 하지만, 초안 작성 팀 임무가 두세 번 바뀌었다. 예컨대, 모든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선언문 초안 작성에서 백서 초안 작성으로, 다시 서울대 문리대 시위 현장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할 선언문 초안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모두 취소되었다. 졸업생과 학업을 포기할 수 없는 재학생이 뒤섞여 시간이 부족했다. 학교도 달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또, 능력도 부족하여 백서 구성과 분량 등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특히, 자료수립을 담당한 상대학생들이 불참하는 등 백서 초안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유인물 초안 작성은 우왕좌왕, 시행착오를 거듭할 정도로 계획 자체가 무리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실제 목적이 다른 것일 수 있었다. 예컨대, 유인물 초안 작성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일을 내걸고, 실제로는 호응도와 참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 제1차 시위행동부대 또는 제2차 시위책임부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하려는 것일 수 있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성실하고 신뢰할만하다고 평가를 받았는지 1974년 4월 2일 밤늦게 마포구 합정동 어떤 여관으로 유인물 초안 작성 팀 선배와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날 밤 처음으로 나병식, 정문화, 정찬용, 김병곤 등 70학번 선배들을 만났다. 나는 가정형편을 내세워 제2차 시위를 책임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제1차 시위에서 특별한 임무를 맡지 않고 빠지기로 결정되었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제2차 시위를 책임지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당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 상황이 궁금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함께 학교로 갔다. 이미 시위계획이 누설되었던지 형사들과 경찰들이 까맣게 깔려있었다. 유인물 운반을 책임진 70학번 문리대 선배가 자신은 얼굴이 알려져 교내에 반입할 수 없으니 잠시 보관했다가 시위예정시간에 교내로 반입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2차 시위를 책임져야 한다면서 딱 부러지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유인물 포장뭉치는 무거웠다. 장 모(某)와 김 모(某) 학우라고 기억한다. 셋이서 유인물을 문 모(某) 학우 하숙집으로 운반했다. 약속시간에 교내로 반입했다. 학내 시위는 대오를 갖추기도 전에 몇몇 학우가 강제로 연행되어 결국 미수로 돌아갔다. 유인물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았고, 읽어보지도 못했다. 심리학과 사무실로 운반하여 보관했다가 경찰이 철수한 후 학교 뒤 동숭동 가파른 언덕길과 계단을 걸어가면 나타나는 당시 내 하숙집으로 운반했다. 주인 아주머님께 소각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피신했다. 후일 석방된 후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약속대로 전부 소각했으나 그 일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곤욕을 당했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날 나는 누님 댁으로 가서 하루 밤을 잤다. 다음날 4월 4일 아침 누님께 데모로 당분간 피신해야만 한다는 것, 또 당분간 학교에 다닐 수 없고, 혹시 내가 검거되고 구속되어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그렇게 오래 징역을 살게 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라고 부탁했다. 당일 4월 4일 나는 서울 변두리 송파동에 있었던 사촌 형님 댁이 거주하던 판자 집에 가서 하루 밤 신세를 졌다. 누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비슷한 부탁을 드렸다. 다음 날 4월 5일 오후 6시경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다방으로 나갔다. 잠시 후 친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났고, 영문을 몰라 거의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시점에서 곧바로 형사 서너 명이 나타나 수갑을 채워 중부경찰서로 끌고 갔다(평생 죄책감에서 괴로워했을 친구를 위해 성명을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당일 자정 무렵 어디론가 끌려갔다. 남산 중앙정보부였다.  


영장도 없이 강제로 중부경찰서로 연행된 직후부터 시작된 폭언과 체벌, 구타와 고문, 회유와 협박 등은 더 이상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모질어서 연약한 살과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견디지 어려운 몹시 가혹한 것이라서 원래 내용대로 객관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고문을 하는 자들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악마일 뿐이고, 고문을 당하는 자도 제대로 된 인간적인 심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87년 민중독자후보를 통한 민주연합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대통령선거운동을 주도한 이후 관련자들이 그 과정을 평가하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고자 몇 차례 만났지만 특별한 결론이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것을 마치 이적단체를 결성하려고 예비음모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88년 4월경 다시 불법으로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기억이 서로 뒤섞여 선후관계를 분별하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것은 수사기록과 공소장 및 재판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서는 곤란하며, 많은 허위사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산 중앙정보부로 강제로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음에도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발각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켰다. 그 대신 이미 발각되어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그 수사를 종결시키고자 관련성을 시인하라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경우에는 그렇다고 허위로 자백했다. 또, 허위자백 진술서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작성하도록 강제하여 암기하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실제로 참석하지 않아서 전혀 알 수 없었는데도 그처럼 중요한 모임에 빠질 리가 없다면서 시인하라고 모질게 고문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참석하지 않았던 모임에는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고, 실제로 참석했던 모임은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또한, 나중에는 공소장 등에 나오는 기록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자백인지 나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억눌려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쉽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생생하던 기억도 퇴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공소장에는 이근성 선배가 유인물 운반책임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당시 누가 운반책임자인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굳이 내가 먼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아직 살아계신 또 다른 선배가 당사자로서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후일 여건이 허락한다면, 실체적 진실에 입각하여 자서전 등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민청학련 사건은 대부분 조작되고 부풀려진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유신반대운동에 뛰어든 사연 및 어떻게 죽음의 덫이라고 할까 불구덩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가 등을 자세하게 밝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두서없이 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