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뉴스

HOME > 전국뉴스 > 전국뉴스
서울

전국 |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4] 반(反)유신의 폭풍 속 좌절과 실망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27 11:12 댓글0건

본문

-1974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 3학년(72학번), 송운학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5ce96cb8c46f4d903dd5e6d3c7f484f2_1603764714_7393.jpg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당시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작은 승리에 고취되어 11월 초부터 서울 시내는 물론 전국 곳곳 대학가로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또,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에는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등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고등학교까지 시위가 확산되었다. 예컨대, 12월 1일 경기고와 대광고 등에서 시위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방지하고자 조기방학에 돌입했다. 5일에는 광주일고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8일에는 신일고생 120여 명이 4·19묘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더욱 거세어지는 학생시위에 처음에는 초강경정책으로 일관하던 박정희 정권이 12월 7일 결국 구속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했다. 


그렇다면, 유신정권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유화책을 사용했던 것일까? 단순하게 힘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무언가 큰 정치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어서였을까? 당시 나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것은 오히려 유신독재체제가 판을 키워 민주화운동을 일망타진하려는 전략에 따른 교활하고도 악랄한 술책일 수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정보기관이 볼 때, 학생들은 뛰어야 벼룩이고,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과 같은 존재였다. 비유컨대, 돼지새끼 등 어린 동물을 키워 살찐 상태에서 잡아먹거나 튼튼한 종마를 목초지에 자유롭게 방목하는 것처럼 유화책을 사용하여 민주화운동을 상세하게 파악한 후 발원색원하려는 큰 전략적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일 수 있다. 


당시 나는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무언가 밝은 희망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모르고 점점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화책은 유신독재체제가 설치해 놓았던 덫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제1차 조기석방자들을 거의 대부분 강제로 징집한 반면 이례적으로 제2차 석방자들은 거의 대부분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다(이들은 거의 대부분 민청학련 사건에서 주동자급으로 분류되어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민주세력의 강력한 요구로 감형되었고, 거의 대부분 형집행정지 또는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게다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다. 즉, 1974년 4월 3일 민주화요구 시위가 미수로 돌아갔던 바로 그 날 밤 유신독재체제는 마치 모든 것을 파악하여 만반의 검토와 준비가 끝났다는 듯 즉시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했다. 나는 당일 발표장면을 누님 댁에서 TV로 지켜보았다. 어떻게 나도 까맣게 몰랐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보통 ‘민청학련’이라고 약칭한다)이라는 단체명을 정확하게 알아냈는지 또 어떻게 그것이 반국가단체인지를 알아냈는지 특히 이에 대비하여 긴급조치 제4호를 미리 마련해 놓았는지 매우 궁금했다(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내부에 프락치가 있었거나 누군가 밀고하는 등 배신자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와 같은 강력한 불안과 전율 및 의심 등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러한 궁금증 등을 거론함으로써 민주화운동 및 학생 등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이 갖고 있는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꾹꾹 억눌러왔다. 이제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위해 또 그 시대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거나 의심했던 것 등을 모두 솔직하게 공개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당시 유신체제가 사용한 전술적 유화책은 민주화운동세력을 키워서 발본색원하자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일 수 있다.   


독재자 박정희의 강경일변도 탄압을 중단시키는 작은 승리는 나를 비롯한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승리감에 도취하도록 만들고, 들뜨게 만들었다. 또, 이러한 유화조치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함정 또는 덫일 수 있다는 의심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투쟁이 그치지 않았다(아마도 구속과 기소, 학사징계와 강제징집 등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반유신민주화 운동을 계속 전개함으로써 언론인, 지식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에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김수환, 박두진, 백낙준, 이인, 이희승, 유진오 등 재야인사가 유신헌법개정을 요구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이를 위해 1백만 명 서명청원본부를 결성키로 했다고 이들 30여명 서명자를 대표하여 계훈제, 천관우,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백기완 등 6인이 73년 12월 24일 서울 YMCA에서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다. 


이 운동은 각계각층으로 이루어진 재야인사들과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야당 지원 아래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또, 문인들과 일반 시민들도 개헌을 요구하며 서명에 동참했다. 심지어는 공화당에서도 정구영과 예춘호가 탈당하여 민주화운동 세력과 궤를 같이 했다. 


국무총리 김종필과 독재자 박정희가 각각 직접 나서서 이 개헌운동이 불순분자들의 과대망상증이라면서 맹비난함은 물론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위협했다. 하지만, 서명운동은 그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74년 1월 8일 유신체제는 이를 전면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동시에 선포했다. 당시 선포된 긴급조치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 해 1월 14일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장준하와 백기완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또,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이들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실로 엄중한 처벌이었다. 신동엽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풀잎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 소수 대학생과 종교인들을 제외한다면, 국민 거의 대부분이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 날부터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던 4월 3일까지 거의 3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시기 정확한 일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심적 고뇌 끝에 흥사단에 입단했다. 하지만, 함께 서약한 예비단우는 물론 이미 입단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통상단우들도 나에게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 ‘인격혁명’이니 ‘민족개조’니 심지어는 ‘민족중흥’이니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답변은 반유신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도산사상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단우들은 흥사단이 정치운동단체가 아니라는 둥,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는 둥 비겁하게도 현실도피적인 방어막을 쳤다. 실망했다. 내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10개월 동안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도 흥사단은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평생 동지라고 말하면서 영치금 단돈 한 푼은 물론 책 한권도 넣어주지 않았다. 실망은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특히, 후일 석방되어 흥사단 본부로 찾아갔지만, 나는 예비단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명동에서 동숭동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관련 서류를 분실했는지 찾을 수 없다면서 아무런 시정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실망과 배신감은 분노로 발전했고, 흥사단 단우로서 활동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다.    


당시 내 눈에는 흥사단 본부가 위선적이며 보수적인 자기성격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비해 극소수였다고 하나 천주교나 기독교 심지어는 불교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다. 즉, 용감한 기독교계를 필두로 긴급조치 1호 등에 대한 저항운동을 재개했고, 학생들 역시 두려움을 떨쳐내고 저항을 지속했다. 예컨대, 서울대 의대 3학년 3명이 1월 21일 유신헌법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3월 30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5~7년을 선고받았다. 또, 그 뒤를 이어 1월 24일 고영하 등 연세대 학생들이 학교강당에서 유신헌법철폐를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가 구속되어,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7년을 선고받았다.


-흥사단 서울대학교 아카데미 창립 50주년 기념문집 '진리와 정의를 찾다' 수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