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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연재/실화]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3 : 양심과 의리를 버릴 수 없었던 청춘의 민주화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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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희 작성일20-10-26 14:2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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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 3학년(72학번), 송운학 


[전국기자협회=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각종 미디어가 발전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및 상대 학생들이 잇달아 반유신민주화요구 시위와 집회를 개최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의 1주일이 되도록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부정확한 소문만 무성하게 나돌았다. 어느 정도 정확한 인원과 성명 등은 10월 9일 동아일보가 민주화요구 시위와 관련하여 유신독재정부가 홍보하고자 했던 뒤틀린 주장과 협박 등을 대서특필하면서 서울상대 시위를 중심으로 서울대 3개 단과대에서 연속적으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에 달하는 연행자와 구속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을 짤막하게 포함시켜 보도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다. 


그 다음날(10월 10일)에는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세 차례 발생했던 서울대 3개 단과대 시위에서 연행된 대학생 215명 중 120명은 훈방되었고, 95명이 구속 또는 불구속으로 입건되거나 즉심에 넘겨졌다고 밝혔다. 또, 10월 11일 서울대는 시위관련학생 23명을 제명하고 18명을 자퇴처리하고, 56명을 무기정학 처분을 내리는 등 모두 97명을 징계했다. 몇몇 극소수 언론이 이러한 사실을 간단하게 보도했다. 따라서 당시 여러 신문 등을 뒤져 각종 관련 보도를 연속적으로 추적해야만 비로소 추가검거 등 피해를 받은 학생 전체규모를 점점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0월 13일 문리대 학생회장이 동대문 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또, 현장에서 시위 주동자를 놓쳤다고 뒤늦게 깨달은 경찰이 철저한 수사 끝에 추가로 구속하거나 10월 말까지 주동자 등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추가 검거하고 구속했다. 그 결과 김일(사회학과) 등 2명이 17일 추가 구속되었다. 또, 전국에 수배되었던 나병식(국사학과), 강영원(정치학과), 황인성(독문과), 정문화(외교학과), 강구철(정치학과) 등 5인이 각각 17, 18, 19일 등 잇달아 검거되어 10월 30일 구속되었다. 그리하여 학생시위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은 모두 30명(문리대 27명, 법대 1명, 상대 2명)으로 늘어난다. 


한편, 10월 28일에는 즉심에 넘겨져 구류 25일을 받았던 학생들이 날짜를 채우고 만기 석방되었다. 서울대 문리대는 이날 오전, 교양학부는 29일 오전 각각 교수회의를 개최하여 이들에 대한 무기정학을 해제했다. 최종길 교수는 법대 간부 교수 6인 협의회에서 “이번에는 교수도 마땅히 학생들 편에 서야 하며, 학생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가 결국 당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의문사로 일생을 마감했다(당시 제기된 의혹처럼 후일 모진 고문으로 인한 사망, 즉 피살이었음이 밝혀졌다). 


예상했던 그대로 대규모 피해였다. 또, 이러한 대규모 학사징계로 독재정권이 희망했던 것처럼 민주화요구시위가 소강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철저한 언론통제에도 불구하고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서울대에서 잇달아 발생한 시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규모 유신반대시위 관련 소식은 금세 번져나갔고, 다른 대학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처음에는 주로 서울대가 아닌 몇몇 서울 시내 다른 대학에서 소수가 참가하는 산발적인 시위가 조직되거나 다양한 항의행동이 표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지 한국일보 등 극소수 언론이 10월 8일부터 단신으로 짤막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강력한 탄압에도 학생시위가 마른 들판이 불타오르듯 여기저기로 번져갈 기미를 보이자 박정희는 전술적 유화책을 사용했다. 즉, 11월 1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10월 2일부터 5일 사이에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에서 있었던 시위사건과 관련하여 구속 송치된 30명 서울대생 가운데 22명을 기소유예 처분하고, 불구속 입건된 10명도 기소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하면서 나머지 주동 학생들만 엄벌할 것임을 암시했다. 그리하여, 고교친구로서 당일 시위에 단순하게 참가했다가 기소되었던 정치학과 정윤재를 비롯하여 22명에 달했던 학생들 전원이 선고유예로 석방되어 각각 작은 영웅이 되어 되돌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그 이후 전개된 길고긴 투쟁과정에서 무수하게 되풀이된 것으로서 일시적이고도 부분적인 승리에 불과했다. 또, 약 1주일 뒤 거의 대부분 강제징집 대상이 되어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작은 승리도 승리였다. 게다가 이들 학생영웅은 거의 대부분 서울대 문리대 학생이었다. 여기서, 내가 이러한 작은 승리 또는 학생영웅의 귀환 등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자부심 등이 그 이후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0월 2일 연행되지 않았던 학우들이 며칠 후 학교 근처 막걸리 집에서 개최한 비밀대책회의와 관련되어 있다. 나에게도 참석 요청이 왔다. 가정형편을 이유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것은 더 이상 양심과 의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즉각적인 제2차 시위조직 등 강경론이 대세를 이루다가 내가 반유신민주화운동 필요성과 정당성 및 학생석방요구 등을 홍보하자는 온건론을 주장함으로써 격론이 벌어졌다. 당일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각 주장하는 내용을 원고초안으로 작성하여 다시 만나 최종결정하기로 했다. 온건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나에게 초안을 작성하라는 역할이 주어졌고, 다음날 결국 내가 작성한 초안이 채택되었다. 나는 필체가 좋지 않아 읽기 어렵고 쉽게 폭로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필경(筆耕)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함께 ‘가리방’이라 부르던 철판이 있었던 창현교회로 가서 기름먹지 등을 이용하여 유인물을 제작했다. 또, 향후 유인물 초안 작성 임무를 담당하는 대신 유인물 배포 임무에서 제외되었다(이상하게도 정확한 일시와 모임장소 상호 및 참석자 성명 등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보기관이 미처 파악하지 못해 남산 중앙정보부도 추궁하지 않았고, 나 역시 꽁꽁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나는 가능하면 발각될 위험이 적은 일을 하나씩 둘씩 맡아가면서 점점 깊숙이 반유신민주화운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마도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강경일변도 탄압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시적이나마 유화책을 사용하는 등 후퇴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대학생과 고등학생은 물론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유신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를 증폭시키고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방향으로 상황이 변화하자 그것이 무언가 나에게 자신감과 용기 등을 북돋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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