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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연재/실화]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2 : 강처럼 흘러넘친 시대정신, 반유신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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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희 작성일20-10-22 15:1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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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기자협회=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기고] 


▲강처럼 흘러넘친 시대정신, 반유신의 외침    


그렇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반유신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우리나라 대학가에서는 최초였다. 시위가 발생하기 며칠 전 고교시절 학우로서 모 학회에서 활동하던 정치학과 강구철(작고)이 내가 아카데미 회원들과 깊은 관계가 있으니 함께 시위를 주도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가정형편을 이유로 딱 잘라 확실하게 거절하자 이미 구체적인 시위계획이 세워져있다고 실토하면서, 참여분위기 조성 등 협조를 부탁했다. 그래서 믿을만한 몇몇 학우와 문리대 회원들에게 시위일시와 장소 등을 미리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또 그렇게 했다. 


예정된 일시(10월 2일 오전 11시)와 예정된 장소(교내 4.19기념탑)에 당시 서울문리대 학생회장으로서 아카데미 6기였던 71학번 도종수 선배와 강구철 등 상당수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났다. 상당수에 달하는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나는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주변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나도 모르게 집회대열에 합류했다. 선언문 낭독이 끝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적인 집회에 허를 찔렸던지 선언문을 두세 차례 낭독할 때까지 기동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또, 기동경찰이 출동한 이후에도 학교가 학생을 보호하려는 듯 정문을 걸어 잠그고 시간을 충분히 끌어주었다. 그래서 선언문을 낭독한 후 서로서로 어깨에 두 손을 얹어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등 구호를 힘차게 외치면서 문리대 교정에서 법대 교정까지, 다시 문리대 교정으로 이동했다. 상당수 법대생들이 합류하여 총 인원이 약 500여명이나 되었다. 또, 운동권 가요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어떻게들 배웠는지 함께 불렀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나중에는 점점 속도가 빨라져서 거의 뛰다시피 빠른 구보로 바뀌었다. 아마도, 경찰이 후미에서 습격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리대와 법대를 왕복하면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매우 강렬한 감정을 맛보았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환희로 빛나는 햇살이었다. 스스로 눈부시게 빛나는 순백색 빛살처럼 나타나 질식할 것만 같았던 새까만 어둠을 모두 깨끗하게 불살라버리고 순수한 즐거움과 정신적인 기쁨 등을 주는 그 무엇이었다. 늘 잠재적인 경쟁자였던 학우가 그 순간만큼은 협조자는 물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집회참가자가 모두 동지처럼 믿음직했고, 끈끈한 연대의식마저 느꼈다. 우리는 단순히 전문가적 지식인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대학생이 아니라 이미 언행일치와 지행합일 등을 추구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온갖 억압과 탄압 그리고 속박과 구속 등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자 뛰어든 비판적 지성인이었다. 한국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서울대생 중에서도 서울문리대 학생이 가장 용감하고 양심적이라는 가슴 벅찬 자부심으로 온 몸과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치 하늘을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던 해방감이었다.  


당시 맛보았던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 거의 모든 환희와 행복이 그렇듯 매우 짧았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현장에 함께 있었건 저 멀리 떨어져 있었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자에겐 일종의 형벌처럼 무거운 의무와 책무 등이 뒤따랐다. 이토록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무언가 유의미한 일을 통해 부채의식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 의무를 다할 때, 자신과 친구 및 우리 모두를 억누르고, 갈라놓기도 하고, 헤어지게도 만드는, 그리하여 마치 운명인 것으로 오인했던 역사적으로 축적된 거대한 현실구조를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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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본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희미한 기억을 애써 되살려 내자면, 학교가 걸어 잠근 정문을 사이에 두고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과 학생시위대가 한동안 대치하다가 결국 교문이 열렸다. 집회가 시작된 지 약 1시간 30분 뒤였다. 교내에 상주하다시피 근무했던 사복차림 정보과 형사들과 함께 교내로 진입(난입)한 기동경찰이 주동자급이나 적극적인 참여자 및 단순참여자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연행된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머지 학생들은 잡히지 않으려고 모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잡히면,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거의 대부분 정신없이 도망갔다. 전술적 후퇴라든가 질서정연한 퇴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망간 이후에도 경찰이 찾아와서 잡아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공포와 불안 등에 사로잡혔다. 그럼에도 시위과정에서 만끽했던 흥분과 기쁨 등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처럼 불안과 흥분 등을 기묘하게 동시에 느끼면서 학과사무실과 강의실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살아남았음을 확인하고, 함께 반가워하고, 안도하고, 기뻐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누구누구가 잡혀갔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 이야기가 그칠 줄 몰랐다.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와 대화 등이 전염병처럼 번져 10월 4일 서울법대에서, 또 10월 5일 서울상대에서 반유신민주화요구 시위집회가 각각 열렸다고 생각한다. 


당시 3개 단과대에서 각각 잇달아 개최된 시위는 학생비상총회라든가 학생전원회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체학생을 대표하는 학생회가 공식적으로 주최했다. 이미 언급했던 71학번 도종수 선배는 문리대 학생회장이었고, 71학번 이문성 선배는 법대 학생회 간부였다. 또, 71학번 정금채 선배는 상대 학생회장이었다. 이들 선배는 모두 흥사단 서울대 아카데미 6기 회원이었다. 그럼에도 이들 선배는 학내시위와 집회를 사전에 서로 논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반유신민주화시위가 몇몇 학회와 서클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조직한 것이 아니라 단과대학별 학생회가 각각 중심이 되어 개최했다는 것이다. 물론, 시위를 개최하기 이전에 몇몇 학회와 서클 소속 지도부 또는 회원들이 학생회 간부들과 접촉하거나 논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들 학회와 서클은 불법적인 지하조직, 이른바 ‘언더’(under)조직도 아니었고, 비공식 조직도 아니었다. 탄압 또는 불필요한 마찰 등을 피하려고 단체 명칭을 허위로 또는 부정확하게 기재하고, 대표자 성명 역시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일반회원 또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던 일반학우 이름을 기재한 몇몇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지도교수가 있었고, 학교에 등록된 공식조직이었다. 


게다가, 당시 학회와 서클 등은 거의 대부분 단과대별 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령 흥사단 서울대 아카데미처럼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이 동시에 참여했던 연합조직으로서의 학회 또는 서클이 극소수 있었다 할지라도, 단과대학마다 구체적인 사정은 각각 달랐다. 따라서 이들 극소수 연합체적 조직이 단과대학별 개별 학생회를 일방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상호 협력하고 연대하는 관계에 있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반유신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함께 호흡하면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 협력하고 상호 연대한 것이다.   


여기서, 시대정신이라는 용어 자체는 추상적일 수 있다. 또, 시대마다 각각 다른 내용을 함축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동시대를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1973년 10월 2일부터 시작된 반유신민주화운동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양심과 용기만으로 똘똘 뭉쳐있는 몇몇 특정인이나 특정학회 등이 주도했다고 표현하거나 그렇게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는 것은 객관적 근거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을 은폐하여 독점하거나 이를 왜곡시키거나 호도하여 도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와 과거 등을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이다. 오히려 무수하게 많은 시냇물이 모여 샛강을 이루고, 다시 이들 샛강이 모여 강을 이루고, 다시 이들 강이 큰 강을 이루고, 다시 이들 큰 강이 모여 바다를 이르듯 도도한 시대정신이 반유신민주화운동을 만들어 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흥사단 서울대학교 아카데미 창립 50주년 기념문집 '진리와 정의를 찾다'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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