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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연재/실화]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1 : 민청학련 사건은 대부분 조작되고 부풀려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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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희 작성일20-10-21 17:2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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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대표) 
 

[전국기자협회=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기고] 전국기자협회는 박정희 前(전) 대통령 유신정권 시절에 일어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심리학과 3학년 재학 中) 송운학(현 총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씨의 기록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민청학련 사건 연루기 : 민청학련 사건은 대부분 조작되고 부풀려진 것 (또는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유신반대운동에 뛰어든 사연') 


-1974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심리학과 3학년생(72학번) 

-현재 2020년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상임대표 송운학


 ▲유신 독재의 시작, 다가온 반(反)유신의 그림자


​​나는 1972년 동숭동에 있었던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고2 시절 약 2~3개월 동안 흥사단 대전고등학교 아카데미(준비모임)와 우연하게 맺어졌던 인연이 이어져 서울대 아카데미에 가입했다. 산악회에도 가입하여 두 가지 활동을 병행했다. 학교 건물이 부족했든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로 선후배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든지 1학년 시절에는 노원구 공릉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 선물에서 교양과정을 이수해야만 했다.  


 그 해 여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독재자 박정희는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치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모든 것이 위헌이었던 이 선언에는 4가지 비상조치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위헌적인 비상조치를 무기로 12월 27일 국민투표를 강제했다. 그리하여 당일 유신헌법(維新憲法)이 통과되었다. 즉, 자기가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5.16군사쿠테타를 주도하여 자기 스스로 만든 헌법 및 그 토대 위에 세운 이른바 제3공화국을 폐지하거나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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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정희 전[前] 대통령) 


내 모든 꿈과 계획은 민주헌정을 철저하게 파괴한 후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권력을 사실상 1인에게 집중시켜 종신대통령 체제를 보장했던 10월 유신헌법과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산산조각 났고, 엉망진창으로 흩뜨려졌다. 처음부터 유신독재 저항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무척 꺼렸고, 가능한 회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했던 학우들과 선배들은 물론 복학생 선배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창한 인격혁명론이나 흥사단 주류가 신봉하는 민족개조론 등은 비과학적인 준비이론이자 투쟁회피이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제도개혁우선론과 강경투쟁론을 제시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이처럼 학생운동에 적극 동참해달라는 주변 요구와 압박 등이 점점 늘어나자 나는 아카데미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할 수 있는 무언가 유의미한 일을 찾게 되었다. 예컨대, 1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당시 서울대 공대 정문 근처에 있었던 교회에 다니던 몇몇 학우와 목사에게 제안하여 시국강연회를 개최했다. 대성황이었다. 사전에 고(故) 함석헌 선생 댁을 방문했다. 강연을 요청하고 허락을 얻어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가 교회로 함 선생을 직접 모시고 왔다. 또, 대학 2학년(1973년) 1학기 초에는 문리대 학생잡지인 『형성』 편집위원 공모시험에 합격하여, 동기생은 물론 선배 편집위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편집위원으로서 좋은 원고를 발굴하려고 김정환 등 향후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자 했던 학우들과 비정기적으로 만났던 독서모임을 결성하여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관련 문헌도 함께 읽었다. 심지어는 문학반과 연극반 및 마당극 동아리 패들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교시절 또는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거의 20여명에 달하는 학우들이 아카데미에 한두 번 얼굴을 내밀었다(이들은 강구철, 구창완, 권오걸, 김정환, 김제남, 남궁근, 문창진, 문형우, 윤용출, 전홍표, 정가진, 정윤재, 최권행 등 문리대 학우와 박기영, 장원영 등 상대 학우 및 이보훈 등 법대생 그리고 양태열 등 공대생이었다. 다만, 당사자들에게 일일이 아카데미 활동여부를 확인한 것이 아니다. 즉, 불확실한 내 주관적 기억에 불과할 수 있다).


이들 학우는 아카데미 활동에 더 이상 참가하는 것을 꺼렸다. 아마도, 아카데미가 성실성 등 인격혁명과 현실비판 등 사회개혁을 강조함으로써 정치투쟁과 연관될 수 있다는 막연한 부담감과 불안감 등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우려나 기우가 아니었다. 반(反)유신 집회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사단 서울대학교 아카데미 창립 50주년 기념문집 '진리와 정의를 찾다'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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